중국활동/제공

제공

혀니나라 2015. 5. 23. 19:37

 

 

 

 

감독     : 刘嘉靖
제공 역 : 郑元畅 정원창 Joseph Cheng

 

 

 

제공(濟公)화상이 신부를 빼앗은 까닭은?(上)

 

 

동서고금 인류 역사를 통틀어 유명한 인물을 꼽자면 항하(恒河)의 모래알처럼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남녀노소와 신분을 불문하고 많은 이의 공감과 지지를 받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때문이다.


5천년 중국 역사 속에는 세대와 신분을 넘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인물이 더러 있다. 이 중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바로 ‘인간 활불(活佛)’ 제공(濟公)화상이다. 그가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많은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제공을 활불이라 부르며 공경한다.


2009년 션윈(神韻)공연 중에는 이 제공스님을 소재로 한 작품이 있었다.


‘제공이 신부를 빼앗다(濟公搶親)’라는 제목인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하루는 제공스님이 영은사(靈隱寺) 앞을 지나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천목(天目·다른 공간을 볼 수 있는 제3의 눈)으로 바라보니 장차 산봉우리가 떨어져 내려와 산 아래 마을을 덮친다는 것을 알았다. 깜짝 놀란 스님은 마을을 찾아가 큰소리로 장차 닥칠 환란을 말해주며 빨리 대피하라고 알렸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미친 중이 헛소리를 하는구먼!”이라며 손가락질만 할 뿐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곧 닥쳐올 위험을 감지해 마음이 초조한 제공 앞에 마침 어느 집에서 새 신부를 맞이하는 행렬이 지나갔다. 이에 한 가지 꾀를 낸 제공은 다짜고짜 행렬에 뛰어들어 신부를 들쳐 엎고는 줄행랑을 쳤다. 사람들은 미친 중이 신부를 빼앗아가는 것으로 여기고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추격했다. 그런데 스님을 쫓던 사람들이 마을 입구를 막 벗어날 무렵 갑자기 산이 무너지면서 산봉우리가 떨어져 내려 마을을 덮쳤다. 이때 걸음이 느린 한 여인이 큰 바위에 깔릴 뻔하자 이를 본 제공스님이 신통력을 펼쳐 산봉우리를 밀쳐버렸다. 산봉우리는 약간 기울어져 여인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제공의 기지 덕에 모두 위험한 고비를 벗어났다.


위 이야기에서처럼 제공스님은 천하를 돌아다니며 도처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곤 했다. 도둑맞은 사람들에게 물건을 되찾아 주는가 하면 가난한 병자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었다. 이 때문에 제공은 중국 민중들에게 ‘활불(活佛)’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션윈 따라가기’ 이번 호에서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제공스님에 대해 살펴보자.


평범하지 않은 출생-나한의 전생


제공(濟公·1148년~1209년)스님의 본명은 이수원(李修元) 또는 이수연(李修緣)이다. 절강 태주부(臺州府) 천태현(天臺縣) 출신으로, 법명은 도제(道濟)이다.


이수원의 고조부 이준욱(李遵勖·988~1038)은 송(宋) 태종의 부마이자 진국군(鎭國軍)절도사였다. 그의 집안에는 3가지 특징이 있었다. 대대로 벼슬을 했고,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고 뛰어난 업적을 쌓아 ‘송사(宋史)’에까지 이름이 실렸으며, 대대로 열심히 부처님을 믿고 선을 행했다.


북송(北宋·960~1126)이 멸망한 후 그의 집안은 이준욱의 식읍(食邑)이 있던 천태현 영령촌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수원의 부친인 이무춘(李茂春)은 당시 조정의 부패상을 목격하고는 관직을 버리고 조용히 은거하며 독실하게 부처님을 믿었다. 그는 순박하고 베풀기를 좋아했으나 마흔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제공의 부모는 늦도록 자식이 생기지 않자 밤낮으로 부처님께 치성을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모친 왕(王)씨의 꿈에 나한이 나타나 한 떨기 오색(五色) 연꽃을 주었는데, 왕 씨가 그 꽃을 받아먹은 후 오래지 않아 곧 아이를 가졌다.


소흥 18년(1148년) 음력 2월 초이틀, 마침내 기다리던 아들을 얻은 부부는 기쁜 나머지 큰 잔치를 열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다. 당시 성공(性空)이란 고승이 축하연에 찾아와 ‘수연(修緣·수련의 인연이란 뜻)’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 특별한 사명을 띠고 속세에 내려온 나한이라고 한다. 즉, 여래 부처님의 앞자리에 있던 큰 붕새가 하늘의 법을 어기고 속세로 달아나자 붕새의 행방을 찾고자 파견된 항룡나한(降龍羅漢)이 바로 제공이라는 것이다. 속세에 떨어진 제공은 천신만고 끝에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다.


성장환경


영녕촌(永寧村)은 고성(古城) 북문 밖에 있었고 제공의 집은 자계(赭溪·하천 이름)에 있었다. 당시 그의 집안은 역대로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이었고 천태현에서는 명문가였다. 고조부의 식읍이 영녕촌에 있던바, 자계 서쪽 연안에는 거대한 전답도 있었다.  이곳은 지금도 이가양(李家垟)이라 불린다.


명문가 자제지만, 이수원은 다른 부잣집 자제들이 빠지기 쉬운 나쁜 습관에 물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마을 북쪽에 위치한 적성산(赤城山) 서하동(瑞霞洞)에서 책을 읽었고 불가(佛家)와 도가(道家) 교육을 받았다. 천태산은 중국의 대표적인 불교 성지일 뿐더러 도관도 많았다. 게다가 누대에 걸쳐 선을 행하고 독실하게 부처님을 믿던 가풍의 영향으로 이수원은 어릴 적부터 속세를 떠나 수련하고자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출가


이수원은 어린 나이에 양친을 차례로 잃는데, 3년 상을 치른 뒤 열여덟이었다. 이후 약관의 나이에 불문(佛門)에 들어간다. 처음 간 곳은 국청사(國淸寺)지만 나중에 임안(臨按·남송의 수도로 지금의 항주)에 가 영은사(靈隱寺) 혜원(慧遠)에게 의탁했다. 당시 유명한 선종의 고승이던 혜원(慧遠)은 첫눈에 그의 내력을 알아보고는 제자로 삼아 ‘도제(道濟)’란 법호를 내렸다. 선천적인 근기가 워낙 좋아, 도제는 입문하자마자 도를 깨닫고 큰 지혜를 얻었다.


그런데, 도제는 다른 승려들과 차이가 컸다. 자신의 지혜를 감추려고 일부러 히죽거리며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고 심지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 남루한 옷을 걸치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도와주곤 했다. 그의 행색이 마치 미친 것처럼 보였던지라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승려(濟顛僧)’라 불렀다.


세속의 사람들과 사찰의 다른 승려들은 도제의 뛰어난 능력과 개성을 질투했다. 많은 승려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어떤 이는 늘 헐뜯고 모함했다. 한번은 사찰 실무자인 한 승려가 방장인 혜원화상에게 편지를 보냈다. 도제가 선문(禪門)의 계율을 위반했으니 절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혜원은 “법률이란 원래 속인을 위해 만든 것이니 어찌 출가인에게 일률적으로 시행할 수 있겠는가!”라며 “불문(佛門)이 광대한데 어찌 한 미친 승려를 용납하지 못하랴!”라는 답장을 내려 보냈다. 이 일이 있은 후 영은사에서는 누구도 도제의 문제를 언급하지 못했다.

 

제공(濟公)화상이 신부를 빼앗은 까닭은? (下)

 

중국 정통(正統)문화의 정신을 되살린 독보적 공연으로 평가받는 션윈(神韻). 2009년에도 전 세계를 순회한 션윈에는 중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제공(濟公)에 관한 작품이 있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우며 살아있는 부처로 공경받은 송나라 고승이다. 명문가에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수련에 뜻을 둔 그는 출가하지만 갖은 모함을 겪는다. 이번 편에는 제공이 고험 속에서 문명을 떨치고 사람들을 구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정자사의 서기로 문명(文名)을 떨치다


늘 도제를 감싸주던 혜원화상이 입적한 후 제공은 결국 영은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때 제공의 그릇을 알아보고 그를 받아들인 인물이 바로 정자사(淨慈寺)의 덕휘(德輝)장로였다. 덕휘장로는 제공의 글재주가 뛰어난 것을 알고 그를 정자사의 서기(書記)로 임명했다. 서기란 사찰의 문서와 기록을 담당하는 승려를 말한다.


제공은 여기서도 기이한 행동으로 많은 승려들에게 비방을 받았지만 덕휘장로는 혜원이 했듯 모든 비난들로부터 제공을 감싸고 보호해주었다.


제공은 서기의 신분으로 여러 관청을 두루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때 친해진 모(毛)씨와 진(陳)씨 성을 가진 두 태위(太尉)가 그를 존중하며 공양하자 이후로 아무도 그를 욕하지 못했다. 제공은 술에 취하면 시와 문장을 쓰곤 했는데 내포가 아주 깊어 식자층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러던 어느 밤 나한당에서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무너졌는데 덕휘장로도 이때 게송(偈頌)을 남기고 입적했다.
제공은 소림사에서 묘숭(妙嵩) 스님을 청해 주지로 모시고 사찰을 재건하려고 힘썼다. 사찰을 중창하자면 거액의 돈이 필요했다. 묘숭은 제공의 문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후원금을 모집하는 글을 쓰게 했다.


이때 제공이 쓴 문장이 ‘중건정자사소문(重建淨慈寺疏文·정자사 중건을 호소하는 글)’이다. 이중 특히 “아래로 중생을 구해 인심을 감동시키고 위로 구천을 두드려 직접 하늘에 통하고자 한다(下求眾姓,蓋思感動人心 上叩九天,直欲叫通天耳)”는 구절이 인구에 회자됐다.


이 방문(榜文)을 내보낸 뒤 임안 인근에 큰 파장이 일어났다. 문장이 아주 좋다며 베껴 쓰고 전하는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황제도 감동시켰다. “위로 구천을 두드리고 하늘에 통하려 한다”는 등 절묘한 구절에 감탄한 황제는 직접 사람을 파견해 거금을 보시했다.


신통으로 목재를 운반하다


사찰을 중창하는 데에는 큰 목재도 필요했다.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사천에서 좋은 목재를 구할 수는 있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운반하기 쉽지 않았다. 주지스님이 이 문제로 제공에게 상의해오자 제공은 “저는 정자사를 위해 일하고 있고 천이(天耳)도 열려 있습니다. 다만 사천까지 오가는 길이 멀 뿐입니다. 만약 술을 아주 취할 만큼 마실 수 있게 해주신다면 3일 뒤 필요한 목재를 확실히 구해오겠습니다”라고 했다.


제공은 주지스님의 허락을 받고 만취해 3일 내내 잠을 잤다. 술에서 깬 제공이 갑자기 큰 소리로 “목재가 왔다! 목재가 왔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주지가 이 말을 듣고 “목재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자 제공은 “목재는 이미 전당강(錢塘江)을 통해 절 안 성심정(醒心井)까지 운반했습니다. 사람을 시켜 우물 입구에 틀을 설치하고 도르래를 매달아 목재를 끌어올리십시오”라고 답했다.


잠시 후 과연 우물 안에서 큰 목재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여러 사람이 도르래로 목재를 하나 끌어올리자 우물 안에 또 새로운 목재가 나타났다. 이렇게 70개를 끌어올리자 옆에서 나무를 헤아리던 목수가 말했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물 안에서는 목재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뒤 성심정은 ‘신운정(神運井·신통으로 목재를 운반한 우물)’ 혹은 ‘운목고정(運木古井·목재를 운반한 오래된 우물)’이라 불렸다.


제공의 최후


제공은 수많은 기적을 보여줬다. 이 과정에서 탐관오리나 악인들을 응징하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곤 했다. 의술에도 능통해 난치병 환자들을 치료해줬다.


1209년 5월 16일 제공은 목욕재계한 후 단정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눈을 감고 입적했다. 이때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다. “육십년간 어지럽게 살며 동쪽 벽으로 서쪽 벽을 무너뜨렸구나, 이제 수습해 돌아가려니 하늘은 파랗고 물은 여전히 푸르구나.”


제공이 입적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조정의 관리들이 정자사로 달려오는가 하면 각지 고승대덕들이 운집했다. 장례행렬을 따르는 사람들은 수만 명에 달했다. 호포사(虎跑寺) 앞에서 다비식을 치르니 대량의 사리가 나왔다. 정자사 앞에 돌아왔을 때 두 명의 행각승이 주지인 묘숭에게 이렇게 말했다. “육화탑(六和塔)을 지나다 제공을 만났는데 편지 한통 신발 한 켤레를 맡겼습니다.”


묘숭이 깜짝 놀라며 “제공이 임종할 때 내가 다 헤진 신발을 이 신발로 바꿔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소주(蘇州) 서원사(西園寺)에 있는 제공화상의 조상(塑像)이 있는데 생긴 모습이 아주 독특하다. 승모를 삐딱하게 쓰고 너덜너덜한 가사에 누더기 옷을 입었으며 손에는 찢어진 부채를 들었다. 얼굴 표정은 더욱 특이해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다르다. 왼쪽에서 보면 얼굴 가득 웃음을 띠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춘풍만면(春風滿面)이라 한다. 오른쪽에서 보면 얼굴 가득 근심을 띠었다. 정면에서 보면 마치 웃는 듯 우는 듯 보이지만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형상이다. 웃음 띤 얼굴이 깨달음을 얻은 달관한 사람의 표정이라면, 근심스런 얼굴은 중생의 고통을 함께 괴로워하는 자비이다. 제공의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에는 중생을 구하려고 속세에 내려온 대각자의 자비가 담겼다.


제공에 대한 평가

제공의 생애는 간단히  ‘미치광이 전(顚)’과 ‘구제할 제(濟)’로 압축할 수 있다. 제공 자신은 이미 도를 깨달아 속세를 떠날 수 있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미혹에 빠진 중생을 구한다는 사명 때문에 미친 승려의 모습으로 곳곳을 다닌 것이다. 곤경에 처한 이들을 구하고 악인을 징벌한 제공은 중국인들의 마음에 아름다운 이미지로 남았지만, 미치광이 같은 외모 때문에 독특한 인상도 남겼다. 제공이 입적한 후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제공스님을 기리며 떠받들었는데 집집마다 제공화상의 그림을 걸어두기도 했다.


겉모습만 보자면 우스꽝스런 미치광이 승려의 모습이지만 사실 제공은 학문이 깊고 큰 덕을 쌓은 득도한 승려였다. 그를 선종 제50조(祖), 임제종 양기파 제6조(祖)라 부르는 것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의술을 익혀 많은 난치병 환자들을 고쳐줬고 거액의 기부금을 모으는 데도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이렇게 그는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지닌 각각 다른 집착을 이용해 불연(佛緣)을 맺게 도왔다. 이런 의미에서 제공의 별칭인 ‘제전(濟顛)’은 중생구제에 미쳐 자신을 돌보지 않은 승려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제공이 대중에게 베푼 자비가 워낙 컸기 때문일까. 중국에서는 제공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차례 각색돼 책으로 나오거나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됐다. 문예작품 속에는 제공이 일부러 계율을 어기고 술과 고기를 즐긴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과장이 지나쳐 사실 왜곡이 되기도 한다. 물론 대중이 제공을 친근하게 느끼게 되는 장점도 있다.


제공화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제공전(濟公傳)’에 다음과 같은 시가 나온다.

 

 佛祖留下詩一首    부처님이 한 수의 시를 남기셨으니
 我人修心他修口    나는 마음을 닦는데 남은 입을 닦네
 他人修口不修心    남은 입을 닦되 마음은 닦지 않는데
 爲我修心不修口    내 마음 닦게 하려 입마저 닦지 않네

 

장난스럽게 보이는 이 시에는 사실 깊은 뜻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입만 열면 염불을 외고 부처님 말씀을 언급하지만, 그 마음속에는 오히려 선을 향하는 마음이 없다. 뒤에서는 부도덕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누가 진정으로 선량하고 진실한지 평가하자면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는 부족하다.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하지만, 쉽지 않다.


말로만 수련하는 세태에서 무엇이 진정한 자비이고 중생구도인지 행동으로 보인 이가 제공이다.


제공의 이야기가 나온 션윈공연 작품을 떠올려본다. 무용극 ‘제공이 신부를 빼앗다’에서 끊임없이 고개를 가로 흔들던 제공의 모습. 산봉우리가 무너질 것을 감지한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미치광이의 말로 여기자 신부를 들쳐 업고 도망간다. 주민들은 제공의 모든 행동을 ‘미친’ 것으로 여기지만, 결국 제공 덕분에 위험을 벗어난다. 미친 것 같은 제공의 모습에서 사람을 구하기 위한 각자(覺者)의 풍모가 엿보인다.

 


글/ 임영철(동아시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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